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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선시대, 달빛 아래 고요한 산길을 따라 검은 도포를 두른 저승사자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사자의 상징인 검은 부채가 들려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은빛 종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오늘은 누굴 데려가야 하는가….”
저승사자 ‘현우’는 저승의 문서를 살피며 낮게 읊조렸다.
그러나 그때, 희미한 안개 속에서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 현우는 발길을 멈췄다.
산자도 죽은 자도 아닌 기운. 그곳에 서 있는 여인은 검은 한복을 입고, 달빛을 받아 서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천 년을 기다렸습니다.”
여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넌 누구냐?”
현우는 부채를 접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는 천 년을 떠도는 영혼입니다. 이름은 서린.”
천 년 전, 서린은 저주에 걸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운명을 맞았다. 그녀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저승사자들을 찾아 헤맸지만, 누구도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우는 달랐다.
“네 사연을 듣고 싶구나. 하지만 명심해라. 저승사자와 이승의 영혼이 인연을 맺는 것은 금기다.”
서린은 현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천 년 동안 그 금기를 지키며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 순간, 달빛이 더욱 강하게 비치며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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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립션:
천 년을 떠도는 영혼과 저승사자의 운명적 만남.
이승에서의 한 맺힌 사랑이 저승에 닿아, 저주와 축복이 뒤섞인 인연으로 피어난다.
한 번의 사랑이 천 년의 기다림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물 순간이 다가온다.
1: 천 년의 기다림
깊은 산중,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어렴풋이 스며들고 있었다.
어둠이 내린 산길에는 인적 하나 없이 고요했으나, 희미하게 깔린 안개 사이로 검은 도포 자락이 흔들렸다.
저승사자 현우는 말없이 산길을 걷고 있었다. 손에는 검은 부채가 들려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춤에 매달린 은빛 방울이 가볍게 흔들렸다.
– 딸랑.
그때였다.
발길이 멈췄다.
현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중에 이승의 기운도, 죽은 자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있었다.
“나타나거라.”
현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퍼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산길 건너편에서 안개가 걷히며 검은 한복을 입은 여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은 달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긴 머리는 어깨를 타고 흐르듯 떨어졌고, 창백한 얼굴에선 기묘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현우를 향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현우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넌….”
여인은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제 이름은 서린입니다.”
현우는 그녀에게서 감도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살아 있는 자도, 완전히 죽은 자도 아니었다.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니구나.”
서린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저는 천 년을 떠도는 영혼입니다. 저주받아 이승과 저승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지요.”
“천 년을?”
현우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저승사자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데려가는 것이 일이다. 산 자를 건드릴 이유는 없다.”
서린은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 년 전, 제 삶은 이승에서 끝났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저는 염라대왕께서도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제 영혼은 그날 이후, 이승을 떠돌고 있습니다.”
현우는 그녀의 눈빛에서 짙은 슬픔을 읽었다.
“이승과 저승의 법을 어기는 영혼은 저주받는다. 너 또한 그 저주에서 자유롭지 않겠지.”
서린의 시선이 현우를 깊이 꿰뚫었다.
“저의 저주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했던 자의 배신으로 시작된 저주이기에, 풀기 위해선 저를 배신한 자가 아닌 저를 사랑할 자가 필요합니다.”
현우는 피식 웃으며 부채를 접었다.
“그것이 나여야 한다는 말이냐?”
서린은 눈을 내리깔았다.
“천 년 동안 많은 저승사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제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린은 천천히 현우에게 다가갔다. 달빛 아래 그녀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당신은 다를 것 같군요.”
현우는 한 걸음 물러서며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승사자는 이승과 인연을 맺을 수 없다. 그것이 금기다.”
서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곧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천 년을 기다리는 동안, 금기 따위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달빛이 두 사람을 감싸안으며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날 밤, 저승사자와 천 년을 산 영혼의 운명이 조용히 얽히기 시작했다.
2: 운명의 흔들림
서린과의 첫 만남 이후, 현우는 자꾸만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승사자의 길을 걷는 동안 수많은 영혼을 보았지만, 천 년을 떠도는 영혼은 처음이었다.
– 그녀는 저주받은 영혼이다. 저승사자가 감당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어딘가에선 서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천 년 동안 많은 저승사자들이 저를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를 것 같군요.”
그 말에서 느껴진 깊은 한과 고요한 확신.
결국 현우는 저승의 기록을 뒤적이며 서린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서린… 서린…. 천 년 전의 기록이라….”
그는 저승의 심판대에서 오래된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곳엔 천 년 전 조선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서린(瑞璘) – 사망 연도: 단종 1년]
[사인: 억울한 자살, 그러나 타살의 흔적 있음]
[사자 기록: 저승의 문턱에서 이승으로 돌아감. 이후 기록 없음.]
현우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타살의 흔적?
기록은 서린이 당시 한양 사대부의 여식이었으며, 권문세가와의 혼약이 깨진 뒤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단순한 자살로 종결됐다.
현우는 부채를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승에서 조사가 필요하겠군.”
그는 한순간에 안개처럼 사라졌다.
밤이 깊은 한양의 골목, 현우는 사람의 발길이 끊긴 한 저택 앞에 섰다.
오래되어 허물어진 저택이었지만, 그곳엔 묘하게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 저택 한쪽에서 희미하게 서린의 그림자가 비쳤다.
“여전히 여기에 있었군.”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린은 등진 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승에 남아 있다 하여 모든 기억을 간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긴 잊을 수 없었지.”
서린은 천천히 돌아섰다.
“당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천 년 동안 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리 없겠지.”
서린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의 진실입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에 따르면 너는 자살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네 몸에 타살의 흔적이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서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자는 내 혼약자였습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사랑은 오직 탐욕이었어요. 내 아버지의 재산과 지위를 노린 것이었지요.”
그녀는 두 손을 말아 쥐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 혼사를 반대하자, 그는 나를 독으로 죽이려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꾸몄지요. 억울했습니다. 너무나도….”
서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현우는 부채를 펼쳐 바람을 일으켰다. 서린의 슬픔이 바람을 타고 흐르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자는 어떻게 되었느냐?”
서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나를 죽인 후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혼례를 올리기도 전에 갑작스레 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저승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염라대왕의 심판을 피해 숨었지요.”
현우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 자가 아직 이승을 떠돌고 있다는 말인가?”
서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영혼은 저를 따라다니며 저주를 걸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서 천 년을 떠돌게 된 것입니다.”
서린의 눈빛에 서린 듯한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이제 당신이 그를 찾아줄 것이라 믿습니다.”
현우는 서린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저승사자로서의 법과 규칙이 그를 붙들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녀의 슬픔 앞에선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좋다. 그 자의 흔적을 찾아보겠다. 하지만, 너의 저주는 쉽사리 풀리지 않을 것이다.”
서린은 작게 웃었다.
“이미 천 년을 기다렸습니다. 이젠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현우는 조용히 부채를 접으며 말했다.
“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선… 나 역시 금기를 깨야 할 것이다.”
서린과 현우, 두 사람의 운명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얽히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3: 금단의 사랑
깊어진 밤, 현우는 서린과 함께 저택을 벗어나 한양의 고즈넉한 뒷골목을 걸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안개가 피어오르듯 서린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네 저주를 걸어둔 자의 흔적을 찾으려면, 그가 마지막으로 숨었던 곳을 찾아야 한다.”
현우는 부채를 접으며 말했다.
서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영혼은 늘 이 저택을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나를 보면서도 그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현우는 그 말을 곱씹으며 달빛을 올려다보았다.
“네 저주는 단순한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구나. 서로 엇갈린 감정이 이승에 묶여 천 년을 이어온 듯하다.”
서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는 저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일그러진 감정이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제 마음이 아니라, 저를 가둬놓는 것이었지요.”
현우는 서린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사랑은 그 누구도 가두지 못한다. 그가 너를 묶으려 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서린은 그의 말에 가만히 미소 지었다.
“당신은 참 다르군요. 저승사자라면 사랑과 감정을 잊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현우는 부채를 다시 펼치며 천천히 말했다.
“저승사자도 언젠가는 인간이었지. 잊으려 해도, 가끔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서린의 눈동자가 달빛에 흔들렸다.
현우와 서린은 오래된 우물가에 도착했다.
“여기가 그가 자주 오던 곳이야. 이 우물은 한양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지.”
서린이 손끝으로 우물의 차가운 돌을 쓸었다.
현우는 부채를 들어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달빛이 비치자 검은 물결 속에서 어렴풋이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보인다….”
우물 속에서 나지막한 흐느낌이 들렸다. 서린은 우물의 기운을 감지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자의 기운이다.”
우물 아래에는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이승을 떠도는 남자의 영혼이 숨어 있었다.
현우는 조용히 부채를 펼쳐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이 우물 속을 스치자, 남자의 흐릿한 형체가 떠올랐다.
“서린….”
우물 안에서 남자가 서린을 올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끝은 닿지 못한 채 공중에서 허공을 갈랐다.
“왜… 아직도 나를 미워하는가….”
남자의 목소리에는 원망과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서린은 우물가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그저 잊고 싶을 뿐이다.”
현우는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서린을 놓아줘라.”
현우가 낮게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 천 년 동안 이곳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내 것이 되어야 한다.”
서린의 손끝이 떨렸다.
현우는 부채를 높이 들어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녀가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널 저승으로 보내야겠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우물 안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저주의 힘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서린은 조용히 현우의 팔을 잡았다.
“현우… 그를 보내주세요. 이젠 끝을 내야 할 때입니다.”
현우는 서린의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채를 힘껏 휘두르자, 우물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우물 깊숙이 사라져 갔다.
우물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서린은 그곳을 가만히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끝난 걸까요.”
현우는 그녀의 옆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네 저주는 이제 조금씩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서린은 미소를 지으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당신 덕분이에요.”
현우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건 금기다. 하지만… 너를 이대로 놓아두고 떠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서린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 말… 정말인가요?”
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을 기다렸다면, 너도 조금은 쉬어가야지.”
서린은 조용히 현우의 손을 잡았다.
달빛 아래, 저승사자와 천 년을 산 영혼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으며,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새로운 운명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4: 희생과 결단
서린의 손을 맞잡은 현우는 달빛 아래에서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저승의 경계는 더욱 흔들리고 있었다.
갑자기 사방에 퍼지던 안개가 걷히며, 허공에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딸랑.
서린은 깜짝 놀라 현우의 손을 놓았다.
“이 소리… 설마.”
현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승의 문이 열리고 있다.”
안개 사이에서 검은 도포를 입은 또 다른 저승사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고, 가장 앞에 선 자는 염라대왕의 부관인 ‘무영’이었다.
“현우.”
무영은 부채를 접으며 말했다.
“대왕님께서 널 부르셨다. 이승에서 저승의 법을 어긴 죄, 알고 있겠지.”
현우는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이렇게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천 년 동안 저주를 받은 영혼에 끌려다니며, 금단의 사랑까지 맺었다. 이미 선을 넘었어.”
서린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를 데려가시려는 거라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현우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자청할 문제가 아니다. 저승사자가 이승의 영혼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 자체가 금기다. 현우가 이승의 법을 어긴 대가는 그가 직접 치러야 한다.”
서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럴 순 없습니다! 저주를 푼 것은 모두 저 때문입니다. 현우는 그저 저를 도왔을 뿐이에요.”
무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사연은 알겠다. 그러나 저승의 법은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현우는 조용히 부채를 들어 서린 앞을 막았다.
“서린, 물러서라.”
서린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요. 당신이 날 구해줬듯, 이번엔 제가 당신을 지켜야 해요.”
그러나 현우는 그 손을 부드럽게 놓으며 미소 지었다.
“천 년을 떠도는 동안 많이 외로웠겠지. 하지만 이제 너는 자유로워질 수 있어.”
“하지만… 당신은…”
현우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난 저승사자다. 처음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었지.”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무영이 부채를 펼치며 저승의 문을 열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순간, 현우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서린을 대신해 내가 저주를 짊어지겠다.”
무영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저주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현우는 흔들림 없이 답했다.
“서린은 천 년 동안 벌을 받아왔다. 그 벌은 이제 내가 가져가야 할 몫이다.”
서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안 돼요. 당신이 저주를 받으면, 영원히 저승에 갇힐 거예요.”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넌 이미 충분히 견뎠다.”
그 순간,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들었다.
염라대왕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현우, 넌 저승의 사자다. 네가 이승의 영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현우는 염라대왕에게 절을 올렸다.
“대왕님, 제 선택을 존중해 주십시오. 그녀는 이승에 남아야 합니다.”
염라대왕은 깊이 현우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주를 대신 짊어지겠다면, 너는 저승사자의 신분을 잃게 될 것이다. 다시는 저승의 문을 넘을 수 없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서린이 울먹이며 그를 붙잡았다.
“당신이 없다면…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승에서 너를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운명이다.”
염라대왕이 손을 들어 올리자, 현우의 검은 도포가 서서히 흩어졌다.
서린은 흐르는 눈물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현우….”
그 순간, 현우의 손이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울지 마라. 너는 이제 자유다.”
염라대왕이 천천히 손을 내리자, 현우의 모습은 저승의 문 너머로 사라졌다.
서린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달빛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
저승의 문이 닫히고, 서린의 저주는 완전히 풀렸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엔 현우를 향한 그리움이 천 년처럼 깊게 자리 잡았다.
5: 새로운 운명
세월이 흐르고, 조선의 시대는 저물어갔다.
서린은 한양을 떠나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더 이상 저주에 시달리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현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해마다 이맘때면, 달빛이 유난히 밝은 밤에 서린은 마을 뒷산에 올랐다. 산등성이에 올라 달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달빛은 여전히 밝았고, 대답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장터에서 낯익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검은 도포는 아니었지만, 그의 걸음걸이와 뒷모습은 너무도 익숙했다.
서린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설마….”
그녀는 그를 따라 장터 한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작은 서책을 들고 서점을 나서고 있었다. 서린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현우…?”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서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의 얼굴은 현우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더 부드럽고 따뜻했다.
남자는 그녀를 보고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낯익은 얼굴이군요. 저를 아십니까?”
서린은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요. 아는 분을 닮아서….”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윤현입니다.”
서린은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서린입니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서린은 그의 손끝에서 익숙한 온기를 느꼈다.
‘당신이 돌아왔군요….’
비록 그는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잊었지만, 서린은 그저 그가 살아 이승에서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두 사람은 마을을 함께 거닐며 달빛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승사자와 천 년을 산 영혼의 인연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는 듯하지만, 영혼 깊은 곳에서 이미 서로를 알아보고 있었다.
달빛은 변함없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 천 년을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 잘 감상하셨나요?
오늘 전해드린 ‘저승사자와 천 년을 산 영혼’은 이승과 저승, 그리고 운명을 넘어 이어지는 인연을 그린 전설이었습니다.
✨ 어쩌면 우리 곁에도, 천 년을 기다리는 사랑이 있지 않을까요?
이야기는 끝났지만, 전설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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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도 깊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